배불아지트-

“그래요…….” 하필 그때부터라니. 오랜만에 론을 본 날이고, 론에게 이야기하자고 했던 그날인 거 같은데. ‘왜 나를 피하는 느낌이 드는 거지?’ 아니라 생각하고 싶어도 가슴속 깊은 속에서부터 드는 그 찝찝함이 자꾸만 거슬렸다. “켄.” “네.” “혹시 그가 저를 피하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황후 마마의 호위 기사라고 뽑혀 놓고,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 점에 대해서는 정말 송구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따끔히 말을…….”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것 때문에 내가 화났다 생각하는 건지 켄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아, 아니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말하지 않아도 돼요. 어련히 때가 되면 오겠죠. 그저 그가 돌아오기를 내버려둬 줘요.” “알겠습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켄은 언제나 우리보다 반 발자국 뒤에 서서 따라오곤 했다.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라면 우리의 뒤를 맡겨도 될 것 같다는 느낌과 생각이 들었다. 론의 형제임에도 묘하게 켄에게는 믿음이 갔다. “그러면 손님들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말을 전해 주겠어요?” “네.” 그 말과 함께 켄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여전히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놀기 바빴다. “샤샤. 르델로.” “네?” “응 언니야!” “곧 손님이 온대.” 그 말에 두 아이가 자리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손님이라니 생각만 해도 재미없어. 눈 토끼. 우린 저기 가서 놀자.” “응!” 내가 제대로 이야기도 안 했건만, 아이들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얼마나 그동안 당한 게 많으면 저런 반응일까. 샤샤와 르델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돗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러고선 자기들끼리 숙덕거리며 놀기 바빴고, 난 손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손님…… 마탑에서의 손님이면 세헬루스려나. 아니면 마탑에서 샤샤와 친하게 지냈다던 아이이려나. 세헬루스라면 아직 질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가 아니길 바랐다. 혹여나 세헬루스라면, 내가 너무 못된 인간인 거 같아서. 꽤 시간을 줬는 데도 아직도 그가 한 말을 조금도 알아보지 않았고,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아서 조금 양심에 찔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아니고서야 별궁에 올 사람은 없겠지……. 심지어 마탑에서 샤샤와 잘 지냈다는 아이마저 데려온다고 했으니. “오랜만이네요.” 이전에는 누가 봐도 마법사처럼 입고 왔지만, 오늘은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었다. 여전히 안경을 쓰고 있었고, 흑색의 머리칼은 길게 늘어뜨렸지만 그래도 꽤 큰 변화였다. “세헬루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저를 기억해 주시는군요.” “그렇게 강한 인상을 주었는데, 기억 못 할 리가 없죠.”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다행이에요. 저를 기억하지 못하면 조금 슬펐을 거 같거든요. 그보다 오늘은 다른 용무로 왔습니다.” 세헬루스는 제 뒤에 서 있던 아이의 어깨를 다독였다. 여전히 두건을 푹 내려쓰고 있는 아이. 그 모습만 봐도 아이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아…… 너는.” 마탑에 갔을 때 문을 열어 주었고 마지막에 내게 질문을 했던 아이였다. 샤샤와 친하게 지낸다던 아이가 바로 이 아이였구나. “기억하실까요…… 황후 마마. 아…… 아니지. 우선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오늘도 두건을 그리 내려썼는데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요.” 어쩐지 기가 확 죽어 있는 듯 굴던 아이는 내가 자신을 알아보자 기쁜 듯 배시시 웃었다. “기쁩니다. 황후 마마께서 저를 기억해 주시다니.” “기쁠 것까지야. 잘 지냈니?” 그 말에 아이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고, 덕분에 두건이 살짝 벗겨졌다. 아이의 머리칼도 칠흑보다 어두운 검은색이었다. 저렇게 예쁜 머리인데 두건을 왜 쓰고 다니는지……. “네!” “소개 먼저 해야지.” 그때였다. 두건을 쓴 아이가 신나 하자, 세헬루스가 아이를 막았다. 그제야 자기소개 할 게 생각난 듯 아이는 머리를 꾸벅 숙였다. “메르킨이에요!” “아. 메르킨……. 어? 메르킨?” 지난번에 세헬루스가 말했던 새로운 자가 메르킨이었는데? “어……. 혹시 네가…….” “네?” “새로운 자니?” “아! 자, 잠시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보다 더 늦게 마탑에 들어온 사람이 없기도 하고……. 게다가 저보다 더 어린 나이에 마법사가 된 사람이 현재 없어서……. 세헬루스 님께서 새로운 자로 삼으셨어요.” 아아. 그런 거구나. “마법사가 되었구나.” 전 마탑주가 있었더라면 이 아이는 마법사조차 되지 못했을 거다. 마탑주는 우선 돈 많고 빽 있는 사람들을 마법사로 임명해 주었다. 그 이후에는 지원자들 중에서 선정했고.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그렇게 데려다 썼음에도 그는 보육원 아이들을 절대 마법사로 받아 주지 않았다. 마법사로 삼으면 아이들의 행적이 모두 추적되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쓸 수 없었으니까. 그가 보육원에서 쓸모 있는 아이들을 데려오면서 했던 마법사로 삼아 주겠다는 약속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네…… 그렇게 되었어요!” 메르킨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축하해.” “아닙니다. 이게 다 황후 마마 덕분이에요.” “내 덕분?” “세헬루스 님께서 새로이 마탑주가 되지 않으셨더라면, 계속 저는 이용만 당했을 거예요. 마탑에 처음 왔을 땐 마법사가 된다는 것에 기뻤는데, 시간이 지나도 마법사는 되지 못하고 보육원보다 더 못한 취급에 지쳐 있었거든요.” 나는 그런 말을 하는 메르킨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본인이 잘나서 그리된 걸, 내 덕분이라 하지 마. 알았지?” “가, 감사합니다. “그래서, 세헬루스가 데려온 걸 보니 이 아이가 샤샤의 친구인가요?” “맞습니다. 누구보다 오고 싶어 했죠.” 싱긋 웃는 세헬루스를 따라 나도 싱긋 웃었다. “그렇구나. 그런데 메르킨, 왜 이렇게 두건을 내려쓰고 있는 거야?” “그건 제가…… 너무 못난 데다가 버릇이 되어 버려서요…….” “못나다니?” “전마탑주님께서 제 머리를 매우 싫어하셨거든요. 누구와 머리가 닮았다고. 그래서 자주 혼났고 그때부터 두건을 쓰는 게 버릇이 되었나 봐요. 예법에 어긋났다면 죄송합니다. 다음번에는 꼭 벗을게요.” 그 말에 세헬루스가 매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전 마탑주가 메르킨의 머리를 싫어했던 건, 제 머리를 닮아서였죠. 그자는 저를 꽤나 싫어했거든요.” “아아 그렇구나……. 세헬루스의 머리 색도 예쁜데요.” 그 머리 색 때문에 몸이 근육질로 끝내주게 빠진 도베르만이 떠오르는걸. 차마 그 말까진 할 수 없었기에 억지로 웃었다. 세헬루스도 예상치 못한 칭찬이었는지 뒤늦게 날 따라 웃으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건 없죠. 그보다 메르킨이 찾아온 사람이 내가 아니라 샤샤라면, 샤샤를 불러 줘야지.” 메르킨의 얼굴에 기대감이 어렸다. ‘샤샤를 꽤 좋아하나 보네.’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 올라온 게 보인다. 나와 이야기할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지난번 마탑에서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때의 미소 같은 느낌이랄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기에 난 그늘막 아래에 있는 돗자리 쪽을 바라봤다. “샤샤, 친구 왔어.” 그 말에 르델로와 심각한 표정으로 토의를 하던 샤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친구우?!” 그러더니 후다닥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방금 전까지 샤샤와 이야기하던 르델로는 충격을 받은 듯 입만 떡 벌린 채 샤샤를 바라봤다. 우리 쪽으로 오지도 못하고. 하지만 샤샤는 그런 르델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단번에 달려와서는 메르킨을 안았다. “멜!!” “샤샤, 잘 있었어?” “응! 멜 보고 싶었어! 그날 마탑에서 제대로 인사도 못 해서, 나는 너무 속상했어.” 르델로와 있을 때의 그 밝음은 여전하구나. 샤샤는 정말 친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잔뜩 신이 나서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돗자리에 앉아 있던 르델로가 달려와서는 불만스럽게 둘을 떼어 냈다. “뭐 하는 건데, 얘는 누군데!” “아! 돼지! 얘는 내 친구 멜! 멜 이쪽은 어……” “나는 황태자다.” 바로 자신의 지위로 메르킨을 이기려는 듯, 르델로는 고개를 빳빳히 세웠다. 연신 웃던 얼굴에는 이미 웃음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 르델로를 보던 메르킨이 어깨를 들썩였다. “황제 폐하께서는 결혼하지도 않으신 데다가, 황태자 전하의 자리에 오르신 분은 아무도 안 계신 걸로 아는데요.” 생각보다 똑똑한 아이였다. 르델로의 고압적인 말에도 조금의 주저 없이 입을 움직였다. 틀린 말은 전혀 아닌지라, 르델로는 입만 어물거렸다. “뭐…… 뭐……?” 하지만 샤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냐. 멜. 돼지는 황태자 맞아! 황제 폐하께서도 아들이라 하신걸.” “아…….” “그것은 비밀이라 아직은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 메르킨이나 세헬루스도 우선 비밀로 해 줘요.” 아이들 싸움에 괜히 리안드로가 난처해질까 봐 급히 입을 열었다. 그제야 멜은 자신이 실수했다 느낀 건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황태자 전하. 제가 무지하여 이런 실수를 했습니다.” 샤샤보다 두어 살 많으려나. 바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걸 보니 많이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에 반해 우리 르델로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건지, 고개를 숙인 메르킨을 보며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귀엽다니까. “알면 되었다. 나는 귀한 피를 가지고 태어났으니, 앞으로 이런 무례는 끼치지 말도록 해.” 이럴 때는 기가 막히게 예법을 알고 있다니까. “네…….” 그런 르델로의 모습에 메르킨은 한풀 기가 죽었다. 옆에 서서 두 사람의 모습을 번갈아 보던 샤샤는 불만스럽게 르델로를 바라봤다. “야, 돼지.” “왜.” “내 친구 언제까지 고개 숙이게 만들 거야. 그리고 그 핏줄이니 피니 하는 거 되게 듣기 싫어!” “뭐……? 지금 내 앞에서 쟤 편든 거야?” 메르킨은 보육원 출신이다. 자신의 핏줄이 누군지 모르는. 그래서였을까, 평소라면 르델로의 핏줄 타령을 그냥 넘어갔을 샤샤가 르델로를 보며 고개를 휙 돌렸다. “흥.” “……흐응? 지금 나한테 흥이라 그런 거야? 흐응?” 하지만 샤샤는 이미 메르킨의 팔뚝을 잡고선 돗자리 쪽으로 질질 끌었다. “고개 들어도 돼. 핏줄이니 그런 소리 들을 애 아냐, 너는! 그러니까 무시하고 나랑 놀자.” “어……? 그래도 돼?” “어. 저 돼지 마음에 안 들어!” “아…… 황태자 전하.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샤샤가 자신을 이끌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메르킨은 스타베팅질질 끌려갔다.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르델로는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르델로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러다 못 참겠는지 아이는 돗자리로 씩씩거리며 다가갔다. “이 돗자리 내 거거든?!” “여기는 언니와 내 거거든? 별궁은 우리 거라 했어, 폐하가! 그러니까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가만있어!”